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‘다물(多勿)’이란 ‘다시 찾다’라는 사전적 의미이자 ‘옛 땅을 되찾음’이란 뜻의 고구려(高句麗) 말이다. 즉, ‘한나라와 오랑캐들을 쓸어버릴 도모를 하다’라는 뜻으로 1500여 년을 이어 온 민족적 정신이자 민족 주체 의식이라 할 수 있다. 한국예술의 독창성과 우수성을 세계에 널리 알리기 위해 1992년에 창단된 ‘고구려 예술단’도 이러한 ‘다물’의 정신과 맥을 같이 한다. 때론 맛깔스러운 우리 내 음식처럼, 늘 깊이 있던 우리 선조의 지조처럼 흥과 멋을 그리고 우리민족의 주체성을 위해서, ‘다물 성악단’은 20여 년 동안 연주활동을 해왔다. |
판소리명창의 사설단체인 조선성악연구회의 전신은 1934년 4월 24일 조선음률협회(朝鮮音律協會)의 후신으로 창설된 조선성악원(朝鮮聲樂院)이다. 1930년에 설립한 조선음률협회가 제구실을 못하고 해체되자, 김초향(金楚香)의 후원자 김종익(金鍾翼)이 제공한 가옥 한 채를 계기로 이동백·김창룡·한성준·정정렬·오태석·심상건·김종기·김초향·박녹주·김채련 등은 1934년 4월 24일 조선성악원을 창설하고, 5월 1일 특별성악대회를 공회당에서 개최했다. 그 후 5월 11일 이동백(李東伯)을 비롯해 강태홍(姜太弘)·김동강(金東岡)·김용승(金容承)·김종기(金鍾基)·김창룡(金昌龍)·김채련(金彩蓮)·박녹주(朴綠珠)·송만갑(宋萬甲)·심상건(沈相健)·오태석(吳太石)·정정렬(丁貞烈)·한성준(韓成俊), 이상 14명의 발기로 조선성악원을 조선음악연구회로 개칭하여 공평동(公平洞) 24번지에서 다시 출범하였다.
조선성악연구회라는 명칭은 1934년 10월 경성공회당(京城公會堂)에서 3회 공연이 열릴 때 처음으로 사용됐다. 이 조선성악연구회의 주소는 1934년 9월 관훈동(寬勳洞) 4번지였고, 1936년 낙원동(樂園洞)으로 옮겼다가 1937년부터 1940년까지는 익선정(益善町) 159번지였다. 조선음악연구회를 조선성악연구회로 바꾼 이유는 이 단체가 조선성악의 진흥과 보급을 목표로 정했기 때문이다.
창립 당시의 단원은 명창 이동백·송만갑·정정렬·김창룡을 중심으로 한성준·오태석·정남희·김연수·조영학·임방울·강태홍·조상선·박종기·정광수·정원섭·박상근·신쾌동·강성재·김준섭 및 여류명창 김여란·임소향·김소희·조농옥·한산월·김일선·성미향·김임수·박소군 등이었고, 전성기에는 130여 명의 단원을 거느렸다.
[네이버 지식백과] 조선성악연구회 [朝鮮聲樂研究會] (한겨레음악대사전, 2012. 11. 2., 송방송)